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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월리 망향비 세우던 날
"고향이 댐 땜시 잠겨붕께, 환장하것드라고요" | |
[오마이뉴스] 2005-06-23 14:58 |
[오마이뉴스 마동욱 기자]
탐진댐에 고향을 묻고 우리 나라 전역으로 흩어진 전남 장흥군 유치면 신월리 13가구 25명의 수몰민들은 고향에 변변한 기념물 하나 세우지 못했다. 지난 2000년부터 신월리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기 시작했다. 아니 그 훨씬 전인 80년대 중반부터 30여가구였던 마을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기 시작했다. 2001년 김순복 마지막 이장이 고향을 떠날 때는 단 13가구였고, 단 25명만이 남았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은 고향을 떠나기가 무섭게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다. 고향 떠난 지 이제 겨우 3~4년 지났을 뿐이지만 벌써 4분의 노인이 세상을 떠났다. 2000년에 부산으로 이사 간 박소덕(78) 할머니가 2002년에 세상을 떠났고, 서울로 이사를 간 최재옥(76) 할아버지는 2003년에 세상과 이별했다. 병영으로 이사간 박종택(70) 할아버지는 2004년에 떠났으며, 2000년에 장흥 장평으로 간 박동섭(84) 할아버지는 공교롭게도 망향비를 세운 6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고향을 떠난 노인들이 불과 2~3년도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것은 아마도 고향 잃은 슬픔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탐진댐 때문에 2200여명의 수몰민이 생겨났으며 그들은 전국으로 흩어졌다. 20여 군데 수몰 마을마다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 할머니가 얼마나 많은지 셀 수도 없다. 지난 2001년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진군 병영으로 마지막 이사를 간 전 이장 김순복(73)씨는 때문에 고향 생각이 더욱 애절해졌다.
물론 이전에 고향을 떠나면서 망향비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노인들이 대부분이라 망향비를 세울 기력이 없어 그냥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늦게나마 향우들이 돈을 모아 고향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비석을 세우게 되어 기쁘다며 김순복 전 이장은 말했다. 지난 12일 있었던 신월리 망향비 제막식에서 만난 그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재경향우회장을 맡고 있는 김종문(60)씨는 마지막까지 고향을 지킨 부모 형제가 세우지 못한 망향비를 서울에 살고 있는 9명의 향우들이 나서서 뜻을 모았다고 밝혔다. 재경 신월리 향우회는 지난 83년 고향을 떠나온 신월리 향우 13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개월에 한 번씩 만나고 있다.
"촌에서 살믄 좋았것지만, 신월리는 워낙에 산골이라 교통도 불편하고 농사를 지을 땅도 넉넉하지 못한께 젊은 놈이 살기가 그리 쉽지가 않았당께요. 그래서 동무들이 모두 도시로 떠난 것처럼 나도 지난 83년도에 서울로 갔지라. 촌놈이 서울에서 살기란 그리 만만하지 않았어라. 이것저것 안 해 본 일 없이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도 늘 고향이라는 것이 마음 한구석에서 있었지라. 참말로 힘들 때 고향은 나를 일으켜 주었지라. 그란디 그 고향이 댐 땜시 물에 잠겨붕께, 정말 환장하것드라고요. 고향을 찾았는디... 고향은 오간 데 없고 금방이라도 물이 우리 동네가 있었던 자리 마저 덮쳐 버릴 것 같았는디, 고향의 흔적이 없어 이렇게 망향비를 세우게 되었어라. 우리가 망향비를 세운당께 장흥에 살고 있는 후배들과 친구들이 오늘 잔치를 해야 된다며 전국으로 흩어진 고향 사람들을 한테 모았당께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김옥선(72) 할아버지는 국민학교 4학년 때 고향을 떠나 이웃마을인 강진군 병영으로 이사를 갔다.
"여순 사건과 6·25 전쟁을 고향에서 맞았습니다. 결국 이사를 갔지만 언제나 고향을 잊지 못했습니다. 광주 서중과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 생활로 정년을 맞았지만 시간만 나면 고향으로 달려옵니다. 어린 시절 마을 앞 냇가에서 피라미와 은어를 잡던 기억들이 너무나 생생해 꿈속에서도 자주 고향 마을에 찾아옵니다. 고향을 상징하는 비석을 세우고 나니 그래도 마음 한켠에 물속에 잠기는 고향이 영원히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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