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흔적 2005. 5. 1. 22:29

유치여 안녕!

<동아매거진 34회 1천만원 고료 논픽션 공모 최우수작>

신동규 〈광주 제일화재해상보험 대리점 경영〉

유치여 안녕!

전남 장흥군 유치면은 지형적인 조건이 댐 건설에 알맞은 천혜의 땅이라고 한다. 분지 형국의 낮은 지대이기 때문이다. 광주에서 화순을 경유해 유치면에 이르는 또 다른 교통로인 청풍면 곰치재를 넘어서면 고원지대가 피재까지 한동안 이어진다. 이 피재를 지나 유치면 관내로 들어서면 구절양장 가파른 고갯길을 만나게 된다.

이 피재는 유치면 쪽에서 보면 험한 재지만 반대편 장평면 쪽에서 보면 평지와 다름없다. 내리막길 고개의 끝 지점 당산 삼거리에서부터 장흥읍으로 뚫린 빈재 아래 대리 마을과 영암 쪽 덤재 아래 한대리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웅덩이가 전개되는 것이다.

실개울들이 몸을 불려 가며 낮은 목을 찾아 흘러내리는 탐진강 중류, 부산면 지천리 협곡을 틀어막으면 피재, 빈재, 덤재 안통의 넓은 웅덩이에 많은 물을 갈무리할 수 있어 일제시대부터 댐 후보지로 거론되었다는 것이다.

최근 목포시를 비롯한 서남부 소도시들의 식수난이 심각해지고 또 대불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공업용수 확보가 시급해지자, 당국에서는 주민과 환경단체의 반대를 무릅쓰고 천혜의 땅 유치에 댐 건설을 착수했다.

탐진댐 건설이 확정되고부터 고향 유치면을 자주 찾기로 마음먹었다. 몇 년 후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릴 고향을 한번이라도 더 찾아 한폭의 산수화 같은 풍취며 유년기의 추억거리를 모두 찾아 뇌리 깊숙히 각인하고 싶어서다.

유치면은 산간지대로 산세가 험준하고 골짜기가 깊으며 숲이 무성하다. 풍광이 수려하며 인심 또한 순박하다. 콩 팥 감자 등 밭곡식이 주 생산물이고 산골다랭이에서 생산되는 미곡은 그 양이 많지 않다. 엽연초는 생산량과 질에서 특상품에 속한다.

토질은 사력토여서 참나무과에 속하는 활엽수 성장에 적합하다. 토종 수종인 소나무보다 참나무가 온산 가득하여 양질의 숯을 생산했고, 최근에는 참나무를 이용하여 표고버섯 재배로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표고버섯은 전국 생산량의 절반 정도가 이곳 유치에서 생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천험한 지리 조건 때문에 유치는 옛날부터 외적의 침입 등 국난을 당했을 때는 벼슬아치, 지방 토호를 비롯한 인근 거주민의 피난처로 안성맞춤이었던 모양이다. 또한 정변이나 내란이 발생할 때면 항상 패주하는 저항세력이 최후의 은거지로 선택하던 땅이었다고 한다.

최근세사를 봐도 동학농민혁명, 구한말 의병투쟁, 여순 반란사건, 6?25전쟁 등 격변기마다 유치면 일대는 병란의 피해와 그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았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다


나는 1940년 경진년 음력 10월24일 장흥군 유치면 송정리 공수평이라는 산골 마을에서 신환철(작고)씨와 김애기(현 93세 생존)씨의 다섯째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공수평 마을은 10여호 남짓한 조그만 취락으로, 마을 앞으로는 탐진강 실개울이 흐르며, 마을 뒤에는 아흔아홉 골짜기 어응골이 위치한다. 어응골은 한 골짜기가 부족하여 애석하게도 도읍지가 되지 못했다는 전설로 더 유명하다.

이웃 마을로는 보림사 창건 신화와 연관 있는 용문리와 어응골 초입의 노리목, 피재와 보림사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 당산마을이 위치한다.

보림사는 탐진강 물굽이가 한바탕 용틀임하는 용소를 지나 몇 자락 산모롱이를 돌아가면 가지산 산자락 울창한 비자나무 숲속에 파묻혀 있다. 보림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때 보조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동안 여러 차례 병란을 맞아 소실과 중건을 거듭했고 6·25전쟁 때 사찰 전체가 소실되었다가 최근에 중건됐다.

사찰에는 국보 2점, 보물 2점이 있고, 6·25 때도 유일하게 소실되지 않았던 사천왕각의 사천왕들은 국내 어느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웅장함이 엿보인다. 최근에는 그 사천왕의 뒷면에서 조선 세조가 지은 찬불(讚佛) 서사시 『월인석보』 원본이 발견됐다고 지상에 소개되기도 했다.

나는 유년시절부터 보림사를 자주 드나들었다. 불자인 어머니가 보림사 부속 암자인 송대암에 치성드리러 갈 때면 항상 따라가 그 마을 조무래기들과 어울려 사천왕각 주변에서 곧잘 숨바꼭질 놀이를 했다. 당시 사천왕각 정문에는 괴물처럼 생긴 파수꾼이 양손에 송곳처럼 날카로운 무기를 쥐고 서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 나이 여섯 살 되던, 광복되던 다음해인 1946년 한여름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환갑을 넘긴 아버지는 병약해 항상 탕약으로 연명하셨다. 아버지가 거처하시던 사랑채 앞마당에는 약탕관을 얹은 약화로가 사시사철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아버지의 병은 위암 종류가 아니었나 싶다. 음식을 드시고 나면 속이 거북하다시며 트림을 꺼억꺼억 하곤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많은 재산을 모으지 않으셨다. 우리 가족이 겨우 연명할 정도의 전답밖에 가진 것이 없었다.

장형인 동준은 서른이 넘었고, 그 아래로 둘째 동숙 형이 이십대 중반, 셋째 동운 형은 이십대 초반, 넷째 동석 형과 막내인 나는 십대였다. 그 중간에 처녀 티가 나는 누나와 유년기인 누이동생이 있었다. 위로 두 형이 전처 소생이고 아래로는 모두 재취로 오신 어머니 소생이었다.

장형인 동준은 두 남매를 거느린 가장으로 아버지 생전부터 용문리라는 이웃마을에 따로 살면서 선친의 음덕으로 유치면사무소 공무원으로 있었으며, 둘째 동숙 형은 서울에서 서점 점원으로 일했고, 집에는 어머니, 동운, 동석, 나 삼형제와 누나, 여동생, 그리고 머슴, 이렇게 일곱 식구가 살고 있었다. 나는 어릴 적에 오동이라고 불렸다.

아버지 별세 후 농사만으로는 생계를 꾸리기가 벅차 어머니는 셋째인 동운 형과 함께 동분서주했다. 쇠바퀴가 달린 소달구지를 구입하여 우리 집 소가 끌게 하고 동운 형이 마부 노릇을 했다. 산골마을에서 생산되는 숯과 장작을 가득 싣고 장흥읍내에 서는 오일장에 내다 팔고, 돌아오는 길에는 마을 사람들의 장 짐을 실어주고 삯을 받는 일을 시작했다.

새벽 일찍 소달구지를 따라 집을 나선 어머니는 가파른 고갯길에서는 소달구지의 뒤를 밀어주기도 하고 유치면과 부산면의 경계인 빈재 정상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새참을 차리고 소에게 여물을 먹이는 일을 도왔다. 천성이 근면한데다 고생하는 아들이 안쓰러워 어머니는 한번도 거르지 않고 오일장에 동행했다. 간혹 장짐이 없어 빈 달구지로 돌아올 때도 어머니는 절대로 달구지를 타지 않았다. 소가 가엾다는 이유였다. 어머니는 아들 못지않게 우리집 소도 아꼈다.

물집이 잡힌 발을 절룩거리며 컴컴한 초저녁 무렵에야 집에 당도하는 어머니와 달구지를 맞기 위해 어린 나는 호롱불을 밝혀들고 선대모퉁이 부근까지 마중나가곤 했다. 그 일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일마다 반복되는 일상이 되었다. 당시 임산물 반출은 감시가 몹시 심했지만 장흥군청 산림계에 주사로 근무하던 외숙의 배려로 반출증을 쉽게 구해 영업할 수 있었다.


동운 형의 국방경비대 입대


어머니와 동운 형이 달구지 영업으로 어렵사리 가계를 꾸려갔고 넷째인 동석 형과 나는 유치초등학교에 다니면서 학업에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 집안에 변화가 생겼다. 소달구지 영업을 계속할 수 없는 사단이 벌어졌던 것이다. 소달구지를 모는 동운 형은 항상 신세한탄을 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놈이 평생 마부로 썩을 수는 없다』

포부가 크고 심려가 깊은 동운 형은 터놓고 말은 안 했지만 무언가 인생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무척 애쓰는 것 같았다. 그 무렵 동운 형은 읍내 오일장에 갔다가 시장통에 대문짝만하게 나붙은 「국방경비대 모집」 광고를 본 모양이었다. 국군이 되기로 작심한 동운 형은 어느날 새벽 두엄짐을 지고 논에 나간 후 소식이 없었다. 가시목골 논두렁에 두엄바지개를 내팽개쳐놓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알고 보니 죽마고우인 이웃집 진철 형과 함께 여수 14연대에 지원 입대해버린 것이다.

당시 국방경비대는 광주에 4연대(후에 20연대로 개칭), 군산에 12연대, 마산에 15연대 등 여러 곳이 있었는데도 동운 형이 굳이 여수 14연대를 택한 것은 그 부대가 대우가 좋고 초등학교 선배 한 사람이 조교로 근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념 때문에 14연대를 택한 것은 아니었는데 후에 반란사건이 터지자 경찰에서는 원래 사상이 불순했다는 둥 얼토당토 않은 트집을 잡아 우리 집안에 고통을 주곤 했다.

얼마 후 입대한 동운 형으로부터 편지와 함께 헌 옷이 소포로 왔다. 훈련이 끝날 때 면회 조치가 있어 어머니는 여수까지 면회를 다녀왔다. 그로부터 몇 달 후 동운 형은 첫 휴가를 나왔다. 휴가를 나온 동운 형의 모습은 늠름하기 짝이 없었다.

국방경비대 정모는 품위가 넘쳐 흘렀고 상의 견장에서부터 바지까지 일직선으로 내려뜨린 빨간색 줄무늬의 정복은 참으로 멋졌다. 잘생긴 얼굴에 잘 차려 입은 군복은 씩씩함이 넘쳐 흘러 동운 형을 본 마을 사람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첫 휴가를 다녀간 동운 형은 집에서 멀지 않은 보성강 득량발전소 경비병력으로 차출됐다. 보성과 유치는 가까워 동운 형은 곧잘 외출을 나왔다. 언젠가 한번은 부대장과 함께 M1소총을 휴대한 채 외출 나와 마을 뒤 어응골에서 멧돼지를 잡아 마을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여수부대의 반란


1948년 여름 동운 형은 여수 14연대 본대로 귀대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19일에 유명한 여순반란사건이 발발했다. 제주도에서 발생한 소요사태(4·3 사건)를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로 출동키로 한 동운 형의 부대가 홍순석, 김지회 등 몇몇 공산주의자들의 사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 소식은 곧 마을에 퍼졌다. 어머니는 안절부절 못했다. 새벽마다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아들의 무사 귀환을 빌기도 하고 용하다고 소문이 난 점쟁이를 찾아다녔다. 점괘는 한결같이 동운 형이 아직 살아 있다고 나왔다. 머지않아 서북방에서 홀연히 나타날 것이라 했다. 송대암 부처님의 법력으로 절대로 무사하니 안심하라는 희망적인 점괘가 많아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어머니는 항상 대문을 열어두라고 말했다. 야밤에도 빗장을 걸지 말고 슬며시 닫아만 두라고 머슴살이하는 인배 형에게 당부했다. 언젠가 돌아올 아들을 맞기 위한 어머니의 배려였다. 한밤중에 동네 개가 컹컹 짖어도 아들이 오는가 했고, 바람결에 휩쓸려 온 낙엽이 툇마루를 스쳐가기만 해도 행여 아들인가 하여 봉창문을 열어보곤 했다. 휘영청 달 밝은 밤이면 마당에 나가 여수 쪽 하늘로 눈을 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다. 반란사건이 터진 이후부터 어머니는 습관적으로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으로, 경찰에서는 우리 집을 반란군의 집이라고 해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밀정을 세워 출입자를 감시하는가 하면 지서주임이 직접 찾아와 어머니에게 「아들이 집에 오면 즉시 신고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반란군이 된 형이 언젠가는 집에 나타날 것이라 확신하는 것 같았다.

여수시를 장악한 반란군은 기세등등하게 당일로 순천을 평정하고 주력 일부는 광양 방면으로, 일부는 보성 방면으로 진출했으나 진압차 출동한 광주 20연대 등 국군의 반격을 받아 대패하여 10월22일에 순천이, 25일에는 여수가 탈환되었다. 패잔병들은 뿔뿔이 지리산 백운산 조계산 유치면 보림사 골짜기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여수 순천이 탈환되고 반란군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도 점괘와는 달리 동운 형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소식이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음력 10월 어느 날 밤 동운 형과 함께 입대한 진철 형이 홀연히 돌아왔다. 동운 형의 안부를 묻자, 보성까지는 함께 왔는데 보성경찰서 전투에서 패주한 후 소식을 모른다고 했다. 반란군에게 귀순 기회를 베풀지 않고 생포 즉시 무조건 사살하던 때였으므로 귀순할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진철 형의 아버지는 아들을 농부로 변장시켜 그 밤으로 장평면 일가에게 피신시켰다.

이를 눈치챈 경찰에서는 동운 형이 돌아온 것으로 잘못 알고 우리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말았다. 새벽 일찍 출동한 경찰병력은 마을을 포위한 채 우리 집 동정을 감시하고 있다가 아침 나절이 되자 공포를 쏘며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은 마당에서 가을 콩타작 준비를 하는 어머니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다 알고 왔으니 반란군 아들놈을 내놔!』 하고 호통을 쳤다.

영문을 모르는 어머니는 도리어 경찰에게 물었다.

『무신 말이시란가라? 우리 동운이 안 왔는디라. 나도 우리 동운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 몰라 애태우고 있는 중인디라』

『아주머니 거짓말 말아요! 동운이가 집에 왔다는 정보를 알고 왔는디 그래요?』

지서주임은 험상궂은 얼굴로 어머니를 노려보고 있었다. 말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지서주임은 부하들을 시켜 집 안팎을 샅샅이 수색했다. 착검한 총으로 짚단을 쑤시기도 하고 장독을 열어보며 법석을 떨었으나 오지 않은 동운 형이 있을 리 만무했다. 소득이 없자 울화가 치민 지서주임은 마침 휴가차 집에 와 있던 둘째 동숙 형을 꽁꽁 묶어 마을 앞 탐진강변으로 끌고 가 자갈밭에 엎어놓고 물고문을 가했다.

『동생 어디다 숨겼나? 빨리 불지 못해!』

『나는 모르는 일이오. 동생은 집에 오지 않았소』

물고문 소식을 전해들은 어머니가 맨발로 달려나갔다. 어머니는 지서주임 앞에 매달려 애원을 하였다.

『야는 에미 없이 자란 불쌍한 놈이오, 용서해주시오. 죄는 지 동생 놈이 졌는디 야가 무신 죄가 있다고 그라요. 우리 집은 돌아가신 영감님이 우리 면 면장을 지내신 우익 집안이오. 철없는 애가 출세하겄다고 군대에 간 것이제 딴 뜻이 있었겄소!』

『그 말이 사실이오? 그런데 이 젊은이가 당신 아들이 아니라니 무슨 말이오?』

지서주임은 의아하다는 투로 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지서주임은 물고문을 멈추게 했다.

『당신이 낳은 아들도 아닌디 아주머니 정성이 가상하요, 아들이 돌아오면 꼭 신고해야 합니다! 돌아가신 영감님 체면을 봐서 이만 끝내지요』

지서주임은 병력을 철수했다. 포악한 지서주임이지만 선친에 대해서 전관 예우를 해준 것 같았다. 아들이 14연대에 입대한 어떤 집은 온 가족이 지서주임에게 즉결처분을 당했다는 소문도 나돌던 살벌한 때였다.

경찰이 물러가자 진철네 부모인 염부양반(택호) 내외가 제일 먼저 달려와 위로했다. 어머니의 입에서 진철이 얘기가 나오면 어쩌나 조바심을 치던 진철네 부모는 어머니의 현명한 행동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며 치하를 잊지 않았다.


반란군 부대에서 이탈, 홀연히 나타난 동운 형


그로부터 십여일 후 정말로 동운 형이 돌아왔다. 한밤중에 삽살개가 요란히도 짖어댔다. 쿵 담장 넘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안방 창문에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윽고 『어머니, 저예요!』 하는, 나지막한 동운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 동운이? 아이고 내 새끼야, 인자 오냐!』

어머니는 방문을 화다닥 열고 아들 손을 잡아 방 안으로 끌어들였다. 혹시 염탐꾼이 보는가 하여 방에 불도 켜지 못한 어머니는 몸을 사시나무 떨 듯했다. 지서주임의 고문에도 그처럼 의연하던 어머니였는데 막상 현실로 닥치고 보니 겁부터 나는 모양이었다.

동운 형의 부대가 보성경찰서에 주둔하고 있는데 멀리서 빈 차로 보이는 군용차량이 나타났다고 한다. 경계중이던 반란군이 그 빈 차를 멍청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데 적재함 바닥에 엎드려 있던 국군들이 벌떡 일어나 공격해와 기습을 받은 반란군은 대항 한 번 못하고 뿔뿔이 도망쳤다는 것이다.

동운 형 부대는 화순군 청풍면과 도암면 중장터 부근까지 퇴각, 낙오병을 수습한 후 제2집결선인 보림사 골짜기 소양리에서 본대를 만나 전열을 정비한 후 밤을 도와 보림사 앞길을 거쳐 강진군 옴천면 방면으로 이동중에 잠깐 빠져나왔다고 했다. 지리를 잘 모르는 부대장이 동운 형더러 마을에 가서 길잡이를 물색해오라고 명령해서 마을로 들어왔는데 부대는 지금 어응골 입구에서 휴식을 취하며 형이 길잡이를 데리고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사태를 파악하고 마음을 진정한 어머니는 사랑채로 갔다. 사랑방에는 마을 젊은이들과 동운 형의 죽마고우인 윗마을 노리목 사는 정주 형이 와 있기 때문이었다. 단잠에서 깨어나 정신을 가다듬은 정주 형은 일을 자임했다. 동운 형은 정주 형을 데리고 부대가 있는 어응골 입구로 향했다. 정주 형은 부대를 안내하여 어응골 정상을 지나 대리교 부근에 이르자 부대장에게 말했다.

『저 다리를 건너 대리, 오복마을을 지나 곧장 가면 강진군 옴천면이 나옵니다』

정주 형은 길 안내를 마치고 잽싸게 몸을 숨겼다. 비밀유지를 위해 길잡이를 즉결 처분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동운 형의 체면 때문이었는지 부대장은 정주 형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정주 형은 지금도 고향 노리목에 건재하다. 당시 정주 형이 한 일은 당사자들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당시 누가 그 일을 밀고라도 했다면 정주 형의 인생은 진작 결딴났을 것이었다. 목숨을 건 모험을 싫다 않은 정주 형의 우정은 참으로 눈물겹다.

부대의 후미를 따르던 동운 형은 대변을 보는 척 멈칫거리다가 부대를 이탈, 집으로 줄행랑을 쳤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동운 형은 간단한 요기를 한 후 집을 떠나 마을 뒷산 중턱에 있는 천연동굴 속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낮에는 깊은 산으로 들어가 경찰의 동정을 엿보다가 밤이 되면 동굴로 돌아와 짚덤불을 덮고 잠을 잤다. 먹을 것은 밤늦게 인배 형을 시켜 몰래 가져다주곤 했다. 동운 형의 동굴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낌새를 챘는지 경찰이 날마다 마을을 수색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생각다 못한 어머니는 동운 형을 장흥읍내 외가로 보내기로 작정했다. 읍내 외숙은 공무원 출신이고 또 사촌 외숙들이 경찰간부로 계셨기 때문에 피신해 있기에는 좋은 조건이었다. 농사꾼으로 변장한 형은 그믐밤을 이용해 빈재를 넘어 읍내 외가로 향했다.

읍내 외가에 도착한 동운 형은 상당기간 외숙집에 은신해 있었다. 동운 형은 여순반란사건 패잔병이 거의 소탕되어 감시가 느슨해지자 장흥서초등학교에 청부로 취직하게 되었다.

여순반란사건이 평정된 후 당국에서는 마무리를 위한 조치로 반란군에 가담한 일당에게 귀순 기회를 주었다. 그 기회에 동운 형도 유치지서에 출두, 귀순절차를 밟았다. 귀순절차를 마친 동운 형은 전향서를 쓰고 지서주임의 훈시를 들은 후 훈방조치되어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동운 형은 당시 장흥서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도 강의록을 탐독, 초등학교 준교사 자격 시험을 치르기 위한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6·25 발발, 오토바이 타고 나타난 인민군


1950년 6월25일 마침내 동족상잔의 비극이 발발했다. 전황이 아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당국에서는 후환을 없앨 심산으로 전 남로당원, 여순 반란 귀순자, 보도연맹원 등 전향자들을 일제히 검거하기 시작했다. 동운 형도 예외는 아니어서 직장에서 검거되고 말았다. 그러나 평소 형을 보살펴주던 장흥서초등학교 교장선생님과 경찰간부인 외숙이 동운 형의 검거 소식을 듣고 경찰서장에게 통사정하고 또 선친이 생전에 면장을 지낸 우익 집안이라는 것이 크게 작용해 동운 형은 용케 사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와 광주 나주까지 함락됐다는 소식이 들리자 장흥읍내 관공서들도 화급히 후퇴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동운 형도 근무지인 장흥서초등학교를 떠나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의 편안한 귀향이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겠는가. 불사조처럼 구사일생으로 몇 차례 사경에서 벗어난 동운 형에게 그 귀향이 비극의 시작이었음을….

그때 나는 유치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었고 동석 형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해 장흥중학교에 다녔다. 읍내 외가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동석 형도 동운 형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유치지서 경찰들은 도망가기 바빴다. 완도 방면으로 후퇴, 집결했다가 선박을 이용하여 여수 부산으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한여름, 유치면 소재지에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은 오토바이를 탄 인민군 부대였다. 별이 수놓인 벙거지 모자를 쓰고 다발총을 어깨에 멘 인민군이 오토바이 뒤에 인공기를 펄럭이며 들이닥쳤다.

유치 면사무소와 지서를 무혈 점령한 인민군은 면사무소를 면인민위원회, 지서를 분주소라고 칭하고 남로당원으로 야산대 활동을 했거나 좌익 열성당원을 앞세워 행정과 치안을 장악했다.

평소에 좌익에 심취해 있던 계층 외에도 그동안 좌·우 이데올로기 투쟁과정에 경찰에게 가족을 잃었거나, 지주계층에게 멸시받고 살았던 머슴 출신들이 제 세상 만난 듯 기고만장했다. 부유한 집에서 품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던 사람들까지도 일순 안면을 바꾸어 은혜를 원수로 갚곤 했다.

인민공화국 세상이 되자 어린이들 세계에도 변화가 왔다. 나는 마을 소년단에 입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년단이 하는 일이란 날이면 날마다 인민군 노래를 배우는 것이었다. 모두 군가 일색이었다.

오후만 되면 농악대를 선두로 면소재지에 모여 군중대회에 참가하는 게 어른들의 일과였다. 이승만 괴뢰 도당, 미 제국주의 침략자…. 행사 내용은 항상 천편일률적인 구호의 제창이었고 귀가해서는 밤늦게까지 모여 사상 강좌를 듣고 상호 비판을 하는 등 편한 날이 없었다. 이따금 면사무소 앞 광장에서 인민재판을 열어 지역 유지들을 소위 반동이라고 이름붙여 처단하곤 했다.

그때까지도 우리 집에는 별다른 피해나 변화가 없었다. 아버지가 면장을 지낸 전력 때문에 반동이라는 비판이 나올 법도 했지만 아버지가 현직에 있을 때 덕을 잃지 않았고, 품이 넓은 어머니가 평소에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 주어 원한을 산 일이 없었던 데다가, 장형인 동준 형이 강요에 못 이겨 쓴 용문리 리인민위원장이라는 감투가 방패막이가 된 듯싶었다.

그들이 말하는 빨치산 경력이 있는 여수 14연대 출신 동운 형에 대해서는 같은 부류라고 하여 데려다 쓸 법한데 아무런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동운 형의 전력을 면인민위원회에서는 잘 알지 못하는 듯싶었다.

1950년 무더운 여름이 가고 가을도 깊어갈 즈음 이상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치면 일원에 외지사람으로 보이는 공산당원 숫자가 점점 불어나는 것이었다. 내가 다니던 유치초등학교에도 운동장 가득 병력이 집결했다가 어디론가 떠나곤 했다. 하늘에는 「호주기」라 부르는 전투기들이 고막을 찢는 굉음을 내며 날아가곤 했다.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병력 보충 필요성을 느꼈는지 인민위원회에서는 드디어 동숙, 동운 두 형을 데려갔다. 인민유격대 일원으로 차출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와 동석 형은 나이가 어렸기 망정이지 형들처럼 장성했다면 영락없이 차출되어 공산유격대가 됐을 것이다.


남해여단의 출현


해거름녘이면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으로 갈까마귀떼가 날아왔다. 까맣게 대지를 뒤덮은 갈까마귀들의 울음소리는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그 갈까마귀들은 이따끔 모이를 쪼다 말고 무리를 지어 비상과 하강을 반복하곤 했다. 그때마다 갈까마귀들이 일으키는 바람소리는 태풍을 연상케 하여 오싹 소름이 돋았다.

이파리가 모두 떨어져버린 마을 앞 정자나무가 황량한 대지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몸을 떨고 있는 늦가을 어느날 저녁 무렵, 중화기로 무장한 인민군 정규부대가 우리 마을에 나타났다. 소설가 조정래씨의 『태백산맥』에 나오는 그 유명한 남해여단이었다. 남해여단은 유엔군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히자 북상을 포기하고 영산포로 남하하다가 세지·금정면을 거쳐 덤재를 넘어 오후 늦게 우리 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그들은 우리 집 대문 앞, 추수가 끝나 휴경중인 논바닥에 대오도 정연하게 집합하여 점호를 취했다. 인민군 정규부대는 복장이 지방 유격대와 달랐다. 장비도 어마어마하여 박격포, 수냉식 기관총, 경기관총 등 다양한 무기를 갖추고 있었으며 군기가 엄해 진짜 군인을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은 억양이 세 알아듣기 어려운 이북사투리를 구사했다.

부대장인 듯한 장교가 마을 반장 일을 보는 종철이 아버지를 불렀다. 연신 굽실거리며 쩔쩔매는 반장에게 부대장은 거처 마련을 명령했다. 중대 병력의 인원은 우리 마을과 이웃 마을 노리목, 용문, 당산, 금성(지금은 마을이 없어짐) 등 주변 마을에 고루 배치되었다. 어느 집에서나 안방 한 칸만 집 주인네가 거처하고 나머지 방은 모두 그들의 숙소로 제공되었다. 그들은 가급적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군기가 무척 엄하여 부녀자를 희롱하거나 양식을 훔치는 등의 눈살 찌푸려지는 행동은 별로 하지 않았고 깍듯한 예의도 갖추었다.

남해여단은 군수품의 자체 조달을 위하여 저녁 일찍 출동했다가 새벽녘에 돌아오곤 했다. 돌아올 때는 쌀, 보리 등 식량과 소나 닭 같은 가축을 몰고 왔다. 인근 부산면이나 장평면 등지의 민가를 털어 군량미를 조달한 듯싶었다. 훔쳐온 식량은 그들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집집에 배분하여 밥을 짓게 했고 가축은 도살하여 배당했다.

쇠기름덩이는 녹여 초를 만들어 석유 대신 불을 밝히는 데 사용했다. 그들 덕분에 한동안 쇠고기를 실컷 얻어먹을 수가 있었다. 그때 쇠고기를 많이 먹어 스태미나를 축적해놓았기 때문에 후일 그처럼 험난한 피난생활을 감내했고 또 창궐하던 돌림병도 이겨내지 않았나 싶다.

그들은 날이 갈수록 군량 조달이 어려워지는지 나중에는 논바닥에 가려놓은 볏단까지 통째로 훔쳐왔다. 훔친 물건은 현지에서 징발된 장정들이 짊어지고 왔다. 징발된 장정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땔감을 해오게 하는 등 머슴처럼 부려먹다가 감쪽같이 죽여 없애기도 하고, 낌새를 알고 먼저 도망치다 붙잡히면 즉결처형을 예사로 했다.

한번은 아침에 일어나 대문 밖 휴경중인 논으로 나가보니 사랑채 담벼락에 거적으로 덮어놓는 물체가 여러 개 있었다. 주변에는 총을 든 병사가 보초를 서고 있는 게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말을 들어보니 어젯밤 장흥경찰서를 기습하다가 전사한 동료들의 시체라고 했다. 사십여 리 먼 길을 어떻게 시체를 떠메고 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전쟁에서 죽은 병사에게 조총 발사는 의식의 기본인지 조총 세 발을 발사하고 장례는 끝이 났다. 장례를 마친 시체를 병사들은 들것에 메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후로도 그런 장례행사는 여러 차례 치러졌다.

우리 집은 규모가 크고 방이 여러 개여서 남해여단 본부쯤 되는 모양이었다. 이북 사투리를 억세게 사용하는 군관들은 모두 어린 나를 귀여워했다.

『통일되면 니 피양 데리고 갈끼다』

그런 말을 곧잘 했는데 그때 나는 피양이 무슨 말인 지도 몰랐다.

남해여단 지휘부는 라디오를 이용하여 북한방송을 청취하고 있었다. 배터리가 방전 돼 제 구실을 하지 못하면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영암군계까지 진출하여 달리는 자동차를 습격, 배터리를 훔쳐와 방송을 듣곤 했다.

남해여단이 우리 마을에 진을 치고 있는 동안 우리 마을을 비롯한 유치 전역은 평온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9·28수복이 되어 장흥읍내를 비롯한 대처는 거의가 대한민국의 주권이 회복되었지만 유치와 같은 산골지대는 대한민국 주권이 미치지 못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는, 소위 그들이 말하는 해방구였던 것이다.

장흥 읍내를 접수한 경찰은 유치에 주둔하고 있는 남해여단을 비롯한 지방 유격대 세력에 겁을 먹고 감히 진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밤이면 군수품 조달차 노략질 나온 그들을 막기조차 힘겨워 전전긍긍할 따름이었다. 낮에만 겨우 유치면과 부산면 경계지점인 빈재몰랭이까지 진출했다가 해가 기웃하면 읍내로 되돌아가 야간 기습에 대비하는 게 고작이었다. 장흥군의 중요 기관이 밀집해 있어 「성안」이라고 불리던 읍내 중심부는 공비들의 야습에 대비해 대나무 울타리를 빙 둘러 쳐놓았었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어 울타리 주위에 호를 파 바닥에 대꼬챙이를 촘촘히 박고 물을 끌어들여 접근을 어렵게 했다. 그러나 공비들은 거침없이 장애물을 뚫고 들어가 시가전을 벌여 경찰병력에 막심한 타격을 입히곤 했다.

지방 유격대에 강제로 차출된 동숙 동운 형은 간간이 집에 다녀갔다. 조직의 일원이 되니 자유가 없다고 했다. 두 형은 각기 소속부대가 달라 자주 만날 수 없다고 했다.


전남도당 유격대의 주둔


공비의 해방구인 유치에 갑자기 생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이북방송을 청취하던 공비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인민공화국 만세」를 합창하고 있었다.

한만 국경까지 쫓겨가던 인민군이 중공군 개입에 힘을 얻어 반격을 개시, 평양을 탈환하고 그 여세를 몰아 38선을 돌파, 대전 이남까지 진격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때문이었다. 1·4 후퇴라 일컫는 당시 전황을 이북방송을 통해 전해 들은 남해여단 병력과 지방 유격대는 중공군이 이곳에 도착하여 자기네들을 구출하는 일은 시간문제라고 믿는 듯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들의 표정은 다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대전 부근까지 남하하던 중공군이 유엔군의 반격작전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38선 이북으로 후퇴했기 때문이었다. 전황은 휴전선 부근에서 밀고 밀리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전황이 커다란 변화 없이 장기전으로 접어들 기미를 보이자 정부에서는 방향을 바꾸어 후방에서 준동하는 공비 소탕 작전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그런 작전의 일환이었는지 유치에도 다른 지역에서 지원 나온 경찰병력이 장흥경찰서에 속속 집결했다.

그 무렵 남해여단은 우리 마을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증원된 경찰토벌대들과 일전을 벌이려고 전진배치된 것으로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더 안전한 후방인 보림사 근처로 이동했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지방 유격대가 메우고 있었다. 지방 유격대는 주로 군인민위원회나 내무서에서 근무하던 지방 열성당원이 주축을 이루었다. 장흥 강진 해남 진도 완도 등 남부 지방의 행정 및 치안관서에 근무하던 열성당원들이 도망쳐와 유격대를 조직한 것이다. 그들은 장비도 빈약하고 기강도 없어 보였다.

어느 날 오후에 거의가 노리쇠 없는 소총으로 무장한 남루한 차림의 일개 부대가 우리 집에 나타났다. 우두머리인 듯한 사람이 어머니를 찾았다. 우두머리는 어머니에게 친정 동네 사람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그는 당시 장흥군 군인민위원장(군수급)인 김갑영이었다. 김갑영은 어머니를 만날 겸 우리 집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김갑영의 장흥군당 유격대는 보림사 골짜기로 옮겨가고 우리 집에는 전남도당 유격대가 주둔하게 되었다. 도당 유격대는 경찰에게 가족을 잃었거나 피해를 입은 과격한 젊은이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눈알은 항상 붉게 충혈되어 있었는데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그렇게 된다고 했다.

그들 중에 돼지처럼 살진 왈패 같은 작자가 있었다. 그는 우리집을 아니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걸핏하면 반동의 집이라고 시비를 걸었다. 선친의 전력을 들어 부르주아라고 몰아붙였다. 인민의 피와 땀을 착취하여 이런 큰 집을 지었다며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동운 형을 잘 아는 유격대장이 동운 형의 전력을 들먹이며 『이 집은 혁명전사의 집』 이라고 일갈해 우리를 도와주었다. 동운 형의 14연대 경력이 우리 집안을 지켜준 셈이다.


토벌대의 춘계 대공세


1951년 새해는 유치 산골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음력으로 정월이 지나고 2월로 접어들자 날씨는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겨우내 움츠려 있던 경찰토벌대도 기지개를 켜며 서서히 작전을 개시했다. 그들은 증강된 병력을 휘몰아 빈재를 엿보더니 대리(大里), 단산(丹山)을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유치면소재지를 탈환하여 진지를 구축했다.

항용 하던 대로 면소재지 주변에 대나무 울타리를 치고 호를 파서 강물을 끌어들여 방비를 튼튼히 했다. 105밀리 직사포를 끌고와 면소재지 맞은편 둔지봉 정상에 거치했다. 육중한 야포를 해발 100여m 산 정상으로 끌어올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인근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통로를 만들고 밧줄을 매달아 끌어올렸다.

둔지봉에 거치된 105밀리 직사포는 포신을 갈머리 뒤 문밧재 너머와 보림사 골짜기를 향해 두고 수시로 포탄을 쏘아댔다. 포성은 고막을 찢는 듯했고 그 굉음은 마을주민은 물론 방어중인 공비의 간을 콩알만하게 만들었다.

면사무소에 진을 친 경찰토벌대는 웬일인지 물레방앗간이 있는 선대모퉁이를 경계로 공비와 대치할 뿐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선대모퉁이 바로 윗마을인 공수평 마을과 보림사 골짜기에 빨치산 정예 유격대와 남해여단이 주둔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면소재지가 경찰에 함락된 다음날부터 우리 마을에 주둔한 유격대는 마을 주민에게 대피령을 내리고 낮에는 절대로 집에 있지 못하게 했다. 그들의 작전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였다. 조반을 일찍 먹고 마을을 떠나 인근 산속에 숨어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해가 진 뒤에야 하산하게 했다. 밤에는 마음대로 불을 켤 수가 없었다. 명령을 어기고 낮에 집에 있거나 밤에 불을 켜면 경찰의 끄나풀이라 하여 즉결처분을 서슴지 않았다.

정작 자기네들은 몸을 피하지 않고 집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별의별 짓을 다 했다. 남의 안방에 들어가 잠자기는 예사고 귀중품을 숨겨둔 은밀한 곳까지 수색하여 쓸 만한 물건은 가져가기도 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치우고 가축을 잡아먹기도 했다. 얼마 전에 주둔했던 남해여단 병력은 절대 하지 않던 행동을 그들은 서슴없이 자행하는 것이었다. 질서가 없는 지방 유격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질이 낮았다.

낮동안 어응골 깊은 골짜기에 숨어 있다가 집에 돌아와보니 집 안을 온통 들쑤신 흔적이 보였다. 닭장에 씨암탉도 없어졌다. 첫 수확해 제사며 생일 등 집안 행사에만 쓰려고 정성껏 갈무리하여 앙징맞게 생긴 한 가마들이 질독에 가득 담아놓은 햅쌀이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몹시 흥분했다.

『이따위 짓을 하니까 밤낮 쫓겨다니제…』

어머니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홧김에 공비 두목이 보는 앞에서 내뱉은 독설은 기어코 문제를 만들고 말았다. 혁명과업 완수를 위한 행위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는 것은 바로 반동의 언동이라는 죄목이었다. 공비 본부는 부산을 떨었다. 어디론가 전령이 오갔다. 곧이어 어머니는 포승으로 결박당한 채 안방에 구금되었다.

당시 우리 집에 주둔한 부대에 무데뽀라는 별명을 가진 돼지처럼 생긴 작자가 있었다. 그 작자의 임무는 긴 장검으로 반동의 목을 치는 일이었다. 예전의 망나니 역할이었다. 그는 오후가 되면 시퍼런 장검을 숫돌에 쓱쓱 갈아 날을 세우는 일로 소일했다. 즉결처분은 주로 야밤에 시행했다. 야밤에 어응골 깊은 골짜기나 용소 부근, 숯가마터 같은 움푹 팬 웅덩이, 대나무 숲 등에서 반동의 목을 쳤다. 유치 안통에서 무데뽀의 칼에 맞아죽은 사람이 부지기수라고들 했다.

나는 두 손을 밧줄에 꽁꽁 묶인 어머니 곁에서 한 발짝도 떼지 않았다. 밤이 되자 공비들이 어머니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 나는 울며불며 어머니를 따라 나섰다. 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으려는 나를 호송병들이 이해해주어 동행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들의 상급부대가 있는 다른 마을로 갔다. 지휘부인 듯 널찍한 방에 간부들이 빙 둘러앉아 있다가 어머니가 들어서자 윗목에 앉게 했다. 누군가 어머니의 죄목을 낭독했다. 반동의 행위라는 요지였다. 나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그들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바깥이 떠들썩하더니 동운 형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동운 동무 아니오?』

우두머리인 듯한 사람이 동운 형을 반갑게 맞았다. 구세주를 만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우두머리는 동운 형과 같은 14연대 출신이었던 것이다. 동운 형이 백배사죄하는 선에서 일이 마무리되고 어머니는 훈방조치됐다. 조금만 늦었어도 어머니를 위시한 우리 가족은 그날밤 무데뽀의 장검에 떼죽임을 당할 뻔한 위기일발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동운 형은 어머니에게 신신당부했다.

『어머니, 제발 입조심하시요. 말을 잘못 내뱉다가는 몰사 죽음당하요잉. 내가 알았기 망정이지 큰일날 뻔했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인배 형이 동운 형을 수소문하여 위급한 상황을 전한 덕택이었다.


유랑의 시작


얼마 후 경찰토벌대의 공격은 더욱 격렬해졌다. 영암군과 경계지점인 국사봉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영암경찰서 토벌대는 여세를 휘몰아 한치·인암·신덕리를 경유해 내륙 암천리 방면으로 진격하고 장흥경찰서 토벌대는 보림사 골짜기를 향하여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막강한 화력과 충분한 병참 지원, 증강된 병력으로 사기가 드높아진 토벌대의 거센 공격에 공비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후퇴하는 공비를 추격해 강동 마을 앞까지 진출한 경찰은 이내 공수평 마을까지 단숨에 점령해버렸다. 경찰토벌대는 낮에 공격하고 밤에는 주둔지로 철수하던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점령지에서 야영을 하는 적극적인 전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제 밤이 되어도 집에 돌아올 수 없었다. 새우잠을 자고 아침 먹기가 바쁘게 산 속으로 피난하던 그런 생활마저 불가능해진 것이었다.

그런 주민을 공비는 보림사 골짜기로 내몰았다. 주민을 그대로 두고 가면 경찰에 정보를 제공한다는 이유였다. 마을사람들은 정든 마을을 등지고 간단한 이부자리와 비상 식량을 짊어진 채 공비를 따라나섰다. 우리 가족 역시 우선 먹을 양식과 이부자리 등을 챙겨 이웃마을 용문리로 향했다. 용문리에는 장형인 동준 형이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동준 형은 졸지에 자신의 네 식구에 우리 다섯 식구를 합쳐 아홉 식구의 대식솔을 책임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 용문리도 우리가 피난 온 며칠 후 경찰이 점령해버렸다. 우리 아홉 식구는 마을을 떠나 용문리 뒷산 보림사로 통하는 지름길 중간에 갈대숲이 우거져 은폐가 잘 되는 지점에 토굴을 파고 움막을 만들어 숨어 지내게 되었다.

늦겨울과 초봄이 교차되는 시점에 일교차가 크고 날씨 변덕이 심했다. 어떤 날은 화창하다가도 곧 겨울 날씨로 변했다. 이따금 눈이 내리는 날도 있었다. 그런 기후 조건은 움막 생활을 매우 힘들게 했다.

음력으로 1951년 2월17일. 날짜까지 똑똑히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이 날이 장형 일가의 제삿날이기 때문이다. 이른 봄 화창했던 그날 오후는 우리 집안에 커다란 비극을 안겨준 통한의 날이기도 했다. 점심을 먹고 온 가족이 밀려드는 식곤증 때문에 졸고 있는데 갑자기 움막 가까이에서 고막을 찢는 듯한 총성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피난에 이골이 난 우리 가족은 잽싸게 토굴을 빠져나와 잰걸음으로 산죽이 널려 있어 은신하기 좋은 보림사 쪽 비탈길을 향하여 도망쳤다. 우리가 보림사 근처 산발치 가까이 이르자 이번에는 보림사 쪽에서 경찰토벌대가 총을 쏘며 위로 거슬러오는 게 보였다. 혼비백산한 우리 가족은 가던 길을 되돌아 길 옆 무성한 산죽밭으로 몸을 숨겼다. 방금까지 우리 뒤를 따라오던 장형네 가족은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산죽밭에는 어머니, 누나, 동석 형, 나, 누이동생 다섯 식구뿐이었다. 이윽고 아래 길 쪽에서 두런두런 사람 소리가 들리고 『샅샅이 수색하라구!』 하는 경찰토벌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가족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숨어 있었다.


장형 일가족의 참변


얼마나 지났을까. 경찰토벌대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산 속은 고요했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고 주위가 조용해지자 여기저기서 인기척이 났다.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는 우선 장형 가족부터 찾았다. 그러나 장형 가족은 아무 데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까 우리가 도망쳐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장형 가족이 먼저 토굴 움막에 돌아와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마침 산길을 내려오는, 장형 집 옆에 사는 아낙네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우리 가족을 보자 『살아계셨구만이라』 반색을 하며 어머니를 얼싸안았다.

『우리 동준이네 못 보았는게라?』

어머니는 장형 소식이 우선 궁금했다.

『큰일 나부렀는갑소. 아들네 네 식구가 몽땅 당해부렀소』

『당하다니라? 그 말이 무신 말이당가요?』

영문을 모르는 어머니는 재차 반문했다. 어머니는 사색이 된 채 아낙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녀는 휴우 하고 한숨을 몰아쉬더니 차근차근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장형은 우리 가족보다 한참 뒤처져 움막을 나섰다고 한다. 젖먹이 어린애가 줄곧 보채는 통에 지체하게 되었다. 앞서 간 어머니가 보이지 않아 장형은 무작정 보림사 쪽 산길로 내려오다가 경찰토벌대가 산길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목격하고는 아내와 애들을 데리고 우리가 숨어 있는 산죽밭의 반대쪽으로 은신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올라오던 경찰토벌대가 산죽밭을 향하여 공포를 난사하자 젖먹이 어린애가 기어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여기 숨어 있군! 빨리 나오라! 안 나오면 쏜다!』

어린애를 품에 안은 형수가 경찰토벌대 앞에 몸을 나타냈다. 경찰토벌대는 형수에게 다짜고짜 『남편은 어디 있어?』 하고 호통을 쳤고, 형수는 숲속을 향하여 『여보, 어서 나오란게라!』 하고 소리치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경찰토벌대에게 붙잡힌 장형이 마을 인민위원장이라는 증거가 드러나고 말았다.

경찰토벌대는 『빨갱이 새끼를 잡았다』고 기고만장하며 장형네 가족을 끌고 산 위로 올라가는데 장형은 끌려가면서도 형수에게 『이 웬수놈의 여팬네야! 이 웬수야!』 하는 소리를 수없이 반복했다는 것이다.

장형 가족이 붙들려가고 얼마 후 산 정상 숯가마터가 있는 웅덩이 부근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는데 그 총성이 장형네 가족을 사살하는 총성이었다며 그녀는 눈시울을 붉혔다. 어머니는 병환중이고 동석 형과 나는 철부지인지라 장형 가족의 시신을 수습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무주고혼이 되게 한 일은, 지금도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난리가 평정되고 질서가 잡힌 그 해 여름, 어머니는 인부를 사서 장형 가족의 유골이라도 수습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도 모를 뿐만 아니라 여름 산세가 워낙 무성하여 찾을 수가 없었다.


보림사 소실


그 무렵에 천년 고찰 보림사가 불타고 말았다. 보림사는 인도와 중국에도 똑같은 형태의 절이 있어 동양 삼보림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신라 때 융성하던 구산선문(九山禪門)의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근본도량이었다고 전한다. 사찰 주변에는 비자나무 숲이 무성하고 절 앞으로 국사봉에서 발원한 탐진강이 흘러내리고 있어 경관이 수려한 데다 보물과 국보도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보림사를 소각한 장본인이 누군가에 대해서 지금도 설왕설래하고 있다. 정설로 굳어진 듯한 일설은, 퇴각하던 공비 두목인 한월수라는 자가 추격해오는 경찰토벌대가 보림사를 그들의 진지로 이용할까 우려하여 방화했는데 방화를 자행한 한월수 부대는 천벌을 받았는지 그로부터 얼마 후 화순 접경인 화악산 전투에서 궤멸당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은 사찰을 방패삼아 항거하는 공비의 거점을 없애기 위한 초토작전의 일환으로 경찰이 방화했다는 설도 심심찮게 제기되고 있다. 이 역시 하느님만이 진실을 알고 있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장형네 식구가 없는 토굴에서 밤을 지새운 우리 가족은 날이 밝기 무섭게 마을 쪽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총소리에 놀라 지레 겁을 먹고 보림사 골짜기로 내달렸다. 보림사를 지나 첫들머리 구석몰 마을에 이르자 여기저기서 모여든 백의의 피난민들이 한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일부는 구석몰을 지나 샛터 방면으로 가고 또 일부는 동산리 방면으로 해서 죽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는 죽동 방면을 향하여 정처없는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 군데군데에 시체가 널려 있는 게 보였다.

아침 일찍부터 용문 마을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던 경찰토벌대는 웬일인지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어제 보림사 근처까지 진격하여 장형네 가족을 참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그들인지라 지레 겁을 먹었는데 그들이 추격하지 않자 도망가는 걸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마음 또한 가벼워졌다. 오랜만에 초봄의 자연을 곁눈질하며 가벼운 걸음으로 길을 재촉했다. 한동안 북으로 북으로 길을 거슬러 올라가자 실개울 위에 걸린 징검다리 건너편에 조그만 마을이 보였다. 죽동 마을이었다. 곧바로 가면 암천리, 강만리, 운월리, 소양리로 통하는 길이고, 죽동마을을 거쳐 샛길로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면 산태몰 마을이 있다고 했다.

이곳에서도 사람들은 각기 판단대로 길을 잡았다. 어머니는 산태몰로 가자고 했다. 산태몰 마을에는 여순반란사건 때 소개를 나와 우리집 바깥채에서 더부살이했던 문씨 성을 가진 지인이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씨네는 우리 가족을 반갑게 맞았다. 난리통에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느냐며 안부 부터 물었다. 토굴생활에서 얻은 어머니의 병이 심한 것을 보고 탕약을 달이는 등 대우가 극진했다. 점심 때가 지났는데도 요기를 하지 못한 우리 가족에게 찐 고구마를 한 소쿠리 내놓고 방 한 칸을 치워 어머니를 눕혔다.

그 와중에도 나는 동갑내기인 문씨네 아들과 전쟁놀이에 열중했다. 나무막대기를 소총 삼아 병정놀이를 하는 나를 보고 누나가 『지겹지도 않아서 그놈의 병정놀이를 한다냐!』 호통을 쳐 흥을 깨고 말았다.

산태몰 생활 닷새가 지나자 어머니의 병은 조금 차도가 있었다. 문씨 내외가 정성껏 간병한 덕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강인한 투병정신이 크게 주효한 때문이었다. 『내가 죽으면 어린 느그들 신세가 말이 아닌디!』 어머니는 항상 그 말을 입으로 뇌고 계셨다. 끙끙 신음을 하다가도 끼니가 되면 억지로 음식을 입에 넣곤 했다.

산태몰은 워낙 깊은 산골마을이고 공비의 주력이 진지를 구축하고 일전불사를 벼르는 관계로 경찰토벌대가 쉽게 공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산태몰에서의 닷새는 피난에 지친 우리 가족에게 천금의 휴식기간이기도 했다.

마침 인근에 주둔한 부대에 있던 둘째 동숙 형이 소식을 듣고 우리를 찾아왔다. 동숙 형은 장형 가족의 참변 소식을 듣고는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동복 형제를 잃은 슬픔이 간장을 에는지 동숙 형의 통곡은 처절했다.


가족을 내팽개치고 도망가다


그러나 파죽 지세로 공격해오는 경찰토벌대의 공격에 이곳 산태몰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됐다. 경찰토벌대는 유치면소재지에서 보림사 골짜기를 거슬러 오르며 정면에서만 공격하던 작전에서 벗어나 강진, 영암, 나주, 보성, 화순 등 5개군 접경에서부터 포위망을 압축하며 공격해 들어오는 입체적인 작전을 구사하고 있었다. 요충인 국사봉을 점령한 영암경찰서 소속 토벌대는 서쪽에서, 도암면 중장터 쪽에서는 나주경찰서 소속 토벌대가, 청풍면 화악산 방면에서는 화순경찰토벌대가, 강진군 옴천과 접경인 신월리 방면에서는 강진경찰토벌대가, 보성경찰서 병력은 장평면 쪽에서 협공하기 시작했다.

그 전법은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하여 큰 효과를 보았다. 이제 공비는 사방팔방에서 공격해오는 경찰토벌대와 대결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날따라 유난히 포근하기도 하고 오전 내내 경찰토벌대의 공격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아 편안한 마음으로 문씨네 집 앞 양지바른 담벼락에서 무료한 오후를 볕바라기로 소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마을 앞 쪽에서 벼락치듯 총소리가 울렸다. 건너편 너덜겅에 메아리진 총성은 자글자글 냄비 끓는 소리를 냈다. 경찰토벌대의 기습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피난에 익숙해진 우리 가족은 잽싸게 이불 보따리와 식량자루를 짊어지고 마을을 벗어났다. 피난 가는 많은 마을사람들과 어울려 총소리가 울리는 반대방향, 암천리로 통하는 산길로 무작정 내달았다. 어머니는 병든 몸을 겨우 지탱하며 뒤떨어져 걷고 이불보따리는 누나가 머리에 이었다. 동석 형은 쌀 자루를 걸머메고 막내 여동생은 동숙 형이 등에 업었다.

우리 가족이 걸음을 재촉하는데 바로 등 뒤에서 콩 볶듯 요란한 총성이 들려왔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막내 여동생을 업고 가던 동숙 형이 막내를 땅에 내려놓은 채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내달리는 게 보였다. 나는 무작정 동숙 형의 꽁무니만 바라보며 달렸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경찰토벌대의 총알이 심장을 꿰뚫어버릴 것만 같아 오금이 저려 뒤를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가족의 안위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우선 나부터 살고 보자는 생각으로 도망가는 동숙 형을 따라 무작정 뛸 뿐이었다. 방금 산모롱이를 돌아간 동숙 형이 눈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갈림길도 없는데 어디로 갔을까? 사방을 두리번거리는데 경찰은 나를 표적으로 삼았는지 요란하게 기관총을 쏘아댔다. 귓가로 씽씽 총알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기관총 소리에 놀란 나는 기겁을 하여 다시 뛰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다발총을 손에 든 공비 두 사람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달려와 나를 앞질러갔다. 표적을 잃은 내게 그들은 길잡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들의 꽁무니만 바라보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개울을 훌쩍 뛰어넘으면 나도 그렇게 했고 그들이 가시넝쿨을 헤치며 포복을 하면 똑같이 행동했다. 한동안 달리니 총성이 멀어지는 듯싶었다. 지친 그들도 걸음을 늦추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들은 그제서야 내가 자기들 뒤를 따라왔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나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꼬마녀석이 잘도 따라오는구만』


경황중에 공비들과 함께 섞이다


갈길이 바쁜지 잠시 숨을 고른 그들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암천리 마을 고샅을 빠져나와 산골다랭이 논두렁길을 달려가자 눈앞에 실개울이 나타났다. 국사봉에서 발원한 탐진강의 상류였다. 암천리 앞 실개울은 수심이 얕아 아무나 건널 수 있었다. 공비는 얕은 목을 골라 첨벙첨벙 개울을 건넜다.

그들을 따라 기를 쓰며 개울을 건너던 나는 갑자기 그 자리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이끼 낀 돌멩이에 미끄러진 것이다. 바지가 몽땅 젖어 미꾸라지 꼴이 된 나는 그 와중에 고무신 한짝을 잃고 말았다. 잃은 고무신을 찾으려고 물 속을 두리번거리는 동안 앞서 가던 공비는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을 놓치고 나면 큰일이다 싶어 신발 찾기를 포기한 채 맨발로 공비 뒤를 쫓아 죽을 둥 살 둥 달렸다. 산비탈 길을 한동안 달리던 그들은 바리산 산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바리산은 발산 마을 앞산으로 발산 마을을 지나면 영암 세지면이나 화순 도암면 중장터로 통하는 산길이 있다고 했다. 산세가 험하고 수림이 우거져 은신하기 좋은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어느새 해는 서산에 지고 주위가 어둑어둑했다. 산속의 어둠은 평지보다 빨리 찾아오는 것 같았다. 산 중턱쯤 오르자 경계 초소가 나타났다. 진지에 몸을 숨긴 초병들이 산 아래를 향하여 다발총을 난사하고 있었다. 쫓겨오는 동료들을 지원하는 엄호사격이었다. 초병들은 쫓겨온 공비들과 암구호를 주고받았다. 아군임을 확인한 초병들은 그들을 통과시켰다. 초병들은 이삿짐 뒤에 따라온 강아지처럼 그들의 꽁무니에 매달려와 멀뚱히 서 있는 나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그들에게 눈짓을 했다.

『모르는 애인디요, 산태몰서부터 우리를 따라왔는디, 잘도 따라오던디요』

초병들이 나를 제지하지 않아 그들과 함께 진지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사방이 짙은 어둠으로 변해버려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나를 데려다준 공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화톳불이 산속 여기저기서 봉홧불 오르듯 타올랐다. 화톳불로 산 속은 대낮처럼 밝았다. 이윽고 저벅저벅 말발굽소리가 들리고 이어 화톳불 사이로 백마를 탄 장교가 나타났다. 하얀 백마를 탄 풍채가 준수한 고급장교는 화톳불 주위를 둘러보면서 지나갔다. 공비는 모두 부동자세를 취하며 경례를 올렸다. 순찰을 마친 장교는 저벅저벅 말발굽 소리를 남기고 멀어져 갔다.

『저 분이 전남도당 부위원장인 김선우 동무시다』

공비들은 저희끼리 소근거리고 있었다. 기세좋게 타오르던 화톳불도 차츰 사그라들기 시작하고 주위에 있던 공비들도 하나둘씩 어디론가 사라졌다. 호젓한 산속에 갈 곳 없이 나 혼자 남게 되자 갑자기 겁이 났다. 아까 도망쳐올 때는 경황중에 아무 생각도 못했는데 밤은 깊어가고 배는 고프고 또 나 혼자라는 생각까지 들자 고독감과 공포감이 한꺼번에 온몸을 휘감아왔다.

산태몰 산길에서 헤어진 가족의 안위며 막내동생을 떨쳐버리고 혼자 도망친 동숙 형의 행방이며…. 이럴 때 동숙 형이라도 곁에 있었으면…. 염원이 현실로 되는 경우도 있는가 보았다.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눈앞에 벌어졌다. 풀죽은 모습으로 사그라드는 화톳불을 하염없이 쬐고 있는 내 등 뒤에서 『오동아!』 하는 구세주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깜짝 반가워 뒤를 돌아보니 암천리 부근에서 헤어졌던 동숙 형이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형!』 나는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왈칵 눈물을 쏟으며 동숙 형의 품에 안겨버렸다.

『오동아, 얼마나 놀랬냐? 니가 내 뒤를 따라오는 것을 보고 필시 이 근처 어디에 있을 것 같애 을매나 찾았는지 모른다』

맨발로 달리느라 발에 상처가 난 나를 동숙 형이 들쳐업고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지자 언제 소란을 피웠느냐 싶게 산속은 고즈녁한 적막강산으로 변해버렸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고 어디선가 컹컹 개 짖는 소리가 가끔 들렸다.


동운 형과 마지막 상면


나를 들쳐업은 동숙 형은 산을 내려가 어느 마을로 갔다. 강만리라고 했다. 형은 강만리 이장 집으로 들어갔다. 이장은 형과 안면이 있는지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동숙 형은 이장댁에게 밥을 짓게 하여 나를 먹였다. 이장네 집 사랑방에서 그 밤을 새운 형과 나는 아침을 먹기가 바쁘게 암천리 앞 개울로 나갔다. 어제 잃어버린 고무신 한 짝을 찾기 위해서였다. 개울 속을 살피던 형은 마침내 고무신 한 짝을 찾아 냈다. 어제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을 찾는다며 암천리 마을을 지나 산태몰 가는 산길로 접어들다 말고 동숙 형이 발걸음을 멈춘 후 내게 말했다.

『오동아! 동운 형 보고 싶지 않냐?』

동숙 형이 느닷없는 소리를 했다. 지난번 어머니의 실언 때문에 반동으로 몰려 처형당할 뻔한 위급상황에서 어머니를 비롯한 우리 가족을 구하고 말없이 떠난 동운 형이 불현듯 보고 싶었다.

『보고 싶어. 그런데 형이 어디 있는디?』

『그래, 나만 따라오면 된다』

동숙 형은 가던 길을 되짚어 소양리 쪽으로 향했다. 길은 조금씩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운월리와 갈리는 삼거리를 지나 조금 가자 어젯밤을 묵은 강만리가 조그만 산등성이 위로 모습을 나타냈다. 그 강만리를 지나 한동안 올라가니 소양리였다. 이곳 소양리가 유치면의 끄트머리인 줄 알았는데 그곳에서도 십리 정도 산길을 더 오르면 화순 도암면과 경계를 이루는 가마터재 바로 아래에 취실이라는 마을이 있는데(지금은 없어짐) 그 곳이 유치면의 마지막 마을이라고 했다.

소양리에 남아 있는 공비는 주로 비무장 병력이었다. 무장한 정규병력은 토벌대와의 교전에 모두 투입되고 병든 공비만이 피난민과 한데 섞여 마을 가득 득실거렸다. 남루한 누더기 군복을 입은 병자들은 풀기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정상인이 아님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산속 마을 곳곳에 창궐하고 있는 재귀열에 걸린 환자들이라고 누군가가 귀띔해주었다. 이곳은 돌림병에 감염된 병사들의 요양소라고 했다.

병자들은 초봄의 햇살을 이불 삼아 볕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재귀열은 무서운 속도로 전염돼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보다 이 병으로 죽은 사람들이 더 많을 정도였다. 볕바라기를 하고 있는 환자들 가운데 동운 형이 끼어 있었다.

나를 본 동운 형은 반가워 어쩔 줄을 모르며 어머니와 가족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 동숙 형이 그간의 일을 설명하며 장형의 최후를 얘기하자 동운 형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애들까지 죽이다니! 애들이 무신 죄가 있다고』

동운 형은 매우 침통해했다. 돌림병에 걸린 형은 안색이 몹시 초췌했다. 세수도 안 하고 깎지 못해 텁수룩한 수염 때문인지 이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국방경비대 정복을 입고 의기양양해 뽐내던 젊은 날의 씩씩한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동숙 형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시선을 애써 딴 곳으로 돌리며 난감해하였다. 점심 때가 되자 환자들에게 식사가 배달되었다. 소금물을 적셔 뭉친 주먹밥이었다. 군내나는 김치 두어 가닥이 부식의 전부였다. 배당받은 주먹밥을 동운 형은 나에게 먹였다.

『배고픈디 어서 묵어라』

꾸역꾸역 주먹밥을 먹고 있는 나를 동운 형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두 형은 밥을 먹지 못하고 나 혼자만 염치없이 배를 채웠다. 내가 다 먹기를 기다렸다가 동운 형은 동숙 형에게 말했다.

『형, 빨리 가서 어머니를 찾아봐. 해지기 전에 어서 가. 산태몰로 가서 문씨를 만나면 소식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내게 말했다.

『어머니를 만나거든 이곳을 빠져 나가그라. 읍내 외가로 가그라. 그래야 산다. 어서 가그라』

『형, 잘 있어!』

나는 꾸벅 고개를 숙여 작별인사를 했다.

『그래, 잘 가그라, 오동아!』

동운 형은 내게 힘없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날의 상봉이 동운 형과 마지막이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돌림병을 앓아 몸이 불편한 동운 형은 그로부터 며칠 후 인근 5개군 경찰토벌대의 합동작전시 소양리를 빠져나와 각수바위 부근까지 피했다가 경찰토벌대 중에서도 용맹스럽기로 소문난 「장사의 부대」의 공격을 받아 수많은 공비와 함께 불귀의 객이 되었다고 한다.

그 소식은 그로부터 서너 달 뒤 유치지구 공비토벌작전이 끝난 후 현장 부근에서 직접 목격했다는 누군가가 퍼뜨린 소문으로만 들을 수 있었다. 동운 형이 훌륭한 국군으로 장군이 되어 나타날 것이라는 우리 가족의 기대는 때를 잘못 만난 탓으로 산산이 조각 나버린 것이다.


가족과 재회


동운 형을 면회한 형과 나는 가뿐한 걸음으로 귀로에 올랐다. 암천리 마을을 지나 산태몰로 올라가는 산길로 접어들다 말고 동숙 형은 어제 막내동생을 내팽개친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형은 근처 산죽 숲속을 향하여 나지막하게 외쳤다.

『어무니! 어무니!』

사각사각 산죽 잎을 스치는 바람소리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 형은 가시덤불이 우거진 숲속을 헤쳐가며 곰이 웅크리고 있는 형체의 커다란 바위를 향해 가고 있었다. 벼랑 밑 동굴 속에 혹시 어머니가 숨어있나 해서였다.

『아무도 없어야』

한참만에 돌아온 동숙 형은 손을 내저었다. 형의 손에는 아직도 온기가 느껴지는 갓 죽은 꿩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

『동굴 앞에 금방 솔개가 채다 논 꿩 한 마리가 있드라. 어서 가자』

동숙 형은 꿩의 목을 허리띠에 꿰찬 채 앞장서 산태몰 마을로 향했다. 그날은 하루 종일 평온했다. 경찰토벌대가 휴식을 취하는지, 아니면 내일의 공격을 위한 준비를 하는지 그날은 공격이 없었다. 그들은 작전을 매일 펴지 않았다. 경찰토벌대의 공격 패턴을 눈여겨보면 무언가 공통점이 있었다. 하루 걸러 공격하는 식으로 은연중 주기가 형성되고 있는 터여서 눈치가 빠른 공비는 그런 기회를 적절히 이용하는 지혜를 터득하고 있었다. 동숙 형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지 오늘은 여유롭게 행동했다.

산태몰에는 집집마다 밥짓는 연기가 자욱했다. 사방에서 모여든 피난민이 집집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문씨집에 이르자 어머니를 위시한 온 가족이 돌아와 있었다.

『아니, 어디로 갔다가 인자 오냐, 내 새끼야!』

어머니를 비롯한 우리 가족은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뿔뿔이 흩어졌던 어제의 일을 얘기하며 회포를 풀었다.

어제 오후의 피난길에서 동숙 형이 막내누이를 땅에 내려놓고 도망가고 말자 뒤따르던 동석 형이 대신 누이를 들쳐업었다는 것이다. 바로 등 뒤에서 자글자글 총소리가 들리자 화급한 나머지 어머니와 누이는 근처 산죽 밭으로 몸을 숨기고 형은 막내를 들쳐업고 암천리 어느 인가에 뛰어들어 두엄더미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경찰토벌대가 병력을 철수하여 다시 산태몰 방면으로 올라가고 한동안 있다가 주위가 조용해지자 산죽밭을 빠져나온 어머니와 누나는 흩어진 가족을 찾지 못하고 산태몰 문씨 집으로 다시 찾아들었고, 그 밤을 막내와 둘이서 암천리 민가에서 새운 동석 형은 날이 밝자 산태몰로 올라와 다시 만난 가족이 내 안위를 걱정중이라고 했다.

동숙 형이 주워온 꿩고기로 죽을 쑤어 오랜만에 식구대로 포식을 했다. 신통한 일은 그 꿩고기를 먹고 나서 어머니의 병이 눈에 보이게 호전되기 시작한 점이었다. 몸에 힘이 붙고 걷는 데 자신이 생긴 것 같다고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꿩고기는 해열제로 열병을 앓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신통한 묘약이라는 거였다. 어머니는 그 꿩고기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나를 가족의 품에 안겨준 동숙 형이 작별인사를 했다. 소속부대를 찾아가야 한다고 했다. 이동이 심한 탓으로 제2집결지, 제3집결지를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작별인사를 하면서 동숙 형은 어머니에게 동운 형이 하던 말을 전했다.

『어무니, 읍내 외가로 가십시오』

그 동숙 형도 그 날이 마지막이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하산길에 오르다


이제 동숙 형도 떠나버리고 달랑 우리 가족만 남았다. 어머니는 죽으나 사나 공수평 마을 쪽으로 가보고 싶다고 했다. 집이 불타버렸다고 하는데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여순반란사건 때도 살아남았던, 운이 좋은 우리집이 불탔을 리 없다고 어머니는 굳게 믿고 있었다. 죽어도 집에 가서 죽겠다는 굳은 의지가 어머니의 발걸음을 하산 쪽으로 결정짓게 했던 것이다.

하산길은 산태몰 마을에서 어인동 방면으로 잡았다. 큰길인 동산리, 보림사 방면을 택하지 않고 새터, 어인동 방면으로 택한 것은 보림사 앞 산속에서 당한 동준 형 일가의 참상을 상상하기도 싫고, 하산을 서두르는 일행이 대삼 마을을 지나 문밧재를 넘어 갈머리로 가는 길이 면소재지로 향하는 지름길이라며 앞장을 섰기 때문이었다. 오후 늦게 산태몰을 떠난 탓으로 새터를 지나 어인동 마을에 이르자 해가 뉘엿거리고 있었다. 몸도 지치고 배도 고파와 우리 가족은 걸음을 멈추고 오늘밤을 이 마을에서 묵기로 작정했다. 오늘밤을 이곳에서 묵고 날이 밝으면 신삼, 내삼, 용문리를 거쳐 공수평 집으로 내려가 볼 참이었다.

지붕은 불에 타버리고 벽만 남은 건초장 안을 임시 거처로 여장을 푼 우리는 문씨네가 마련해준 약간의 쌀로 저녁밥을 지어 먹고 멍석을 깐 바닥에 낡은 이불을 둘러쓰고 아무렇게나 누워 밤을 보냈다.

아침이 되자 모두들 밥을 지어먹었다. 아침을 먹은 피난민은 웬일인지 자리를 뜰 생각을 않고 있었다. 딴 때 같으면 아침 먹기가 바쁘게 남부여대한 채 허겁지겁 근처 산 속으로 피신을 하곤 했는데 오늘은 아예 맥이 빠졌는지 아무도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자 도리어 겁이 없어진 것 같았다. 그만큼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는 증거일 것이다.

어머니 역시 마을로 내려가려는 생각을 버렸는지 요지부동이었다. 모두 건초장 바람벽에 등을 기댄 채 말똥말똥 눈을 굴리며 하염없이 앉아 있는데 골목 어귀에서 왁자지껄한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고샅 가득히 몰려오는 사람들은 읍내에서 징발된 젊은이들과 경찰이었다.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정부당국에서는 지금까지 공비와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사살하던 방침을 바꿔 민간인을 공비와 격리시키는 차원에서 읍내 젊은이들과 학생들을 동원, 연고자가 거주하던 마을 근처 산에 들어가 큰 소리로 연고자의 이름을 외치며 귀순을 종용하게 했다는 것이다. 장흥읍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외가의 사촌 형들도 우리 마을 뒤 어응골에 나타나 『고모님!』 하고 외치기를 여러 날 하였어도 아무 대답이 없어 죽은 줄만 알았다는 말을 후일 들었다.

그들은 골목을 가득 메우며 위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인솔자인 듯한 경찰간부 한 사람이 총상을 입은 장정이 신음소리를 내며 누워 있는 건초장 안쪽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노출되지 않으려고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눈치빠른 경찰이 우리를 못 볼 리 없었다. 경찰은 건초장 안에 앉아 있는 우리 일행을 발견했다.

『여기 사람 있다!』

그 외침을 듣고 많은 경찰이 총을 겨누며 포위망을 좁혀왔다.

『모두들 두 손을 머리에 얹고 한 사람씩 밖으로 나오시오!』

모두들 엉거주춤한 자세로 시키는 대로 했다.

『어느 마을 사는 사람들이요?』

경찰의 태도는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민간인이고 뭐고 닥치는 대로 사살하던 경찰이 민간인에게 존대말을 쓰는 것부터가 큰 변화였다. 십여 가구의 피난민은 모두 거주지를 댔다. 갈머리, 배바우, 늑용, 월촌 등 면소재지 부근 마을 사람이 대부분이고 공수평 사람은 우리 식구뿐이었다.

『이 아래 의신, 대삼 마을을 경유 문밧재를 넘어 지서로 가시오. 어이 김순경, 이 사람들 호송하라구!』

갈머리 뒷산으로 통한 문밧재로 내몰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아까부터 어머니의 행색을 유심히 살피던 경찰간부 한 사람이 어머니 곁으로 다가왔다.

『아주머니, 친가가 어디시오?』

『장흥읍 신흥리인디라』

『그래요? 그럼 혹시 김용호 경사를 아시오?』

『용호요? 친정 사촌동생 되구만이라』

『그렇군요, 김경사가 유치에 가면 이러이러한 매씨가 계시니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라고 합디다.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소. 저 사람들을 따라 어서 지서로 내려가시요. 내가 내려가서 김 경사에게 연락해드릴텡게』

『청이 한 가지 있는디요, 가는 길에 공수평 우리 집에 들러가면 안될께라?』

『그렇게 하십시오. 도중에 딴 곳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누가 검문하면 이 표를 주세요』

경찰간부의 배려로 우리 가족만은 문밧재를 경유하지 않고 신삼, 내삼, 용문리를 거쳐 공수평 마을로 내려오게 되었다. 마을은 폐허로 변해 있었다. 아직도 매캐한 연기 내음이 코를 자극했다. 타다 남은 서까래며 기둥들이 잿가루를 뒤집어쓴 채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집 안은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마을을 점령한 경찰토벌대에게 집을 내주고 피난보따리를 겨우 챙겨 용문리 장형 집으로 더부살이 떠난 날로부터 불과 보름 사이, 그 길지 않은 기간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불타버린 집터를 바라보며 방성통곡하던 어머니는 정신을 수습한 후 울 안 남새밭 옆을 파기 시작했다. 피난 가기 전에 묻어두었던 곡식 가마니를 찾기 위해서였다. 당장 끓여 먹을 양식이 없으니 그거라도 찾아야만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벌써 파내가고 없는 게 아닌가.

허탈해진 어머니가 망연자실 탄식을 하고 있는데, 이웃집 진철 형의 아버지 염부양반이 불쑥 나타났다. 염부양반은 어응골에 숨어 있다가 경찰 선무부대에 구조되어 별다른 고생을 하지 않고 그들이 안내한 대로 금사리에 마련된 피난민 수용소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오늘은 경찰의 허락을 얻어 땅 속에 숨겨놓은 곡식이며 세간살이를 찾으려고 왔는데 누군가가 모두 파내가버렸다고 껄껄 혀를 찼다.

『진철이는 무사한가요?』

어머니가 진철 형의 안부를 물었다.

『진철이는 그때 장평 일가 집으로 간 후 유치에 돌아오지 않아 무사하답니다』

염부양반의 대답을 듣고 어머니는 「우리 동운이 놈도 읍내 외가에 그대로 있었으면 이런 모진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인데」 하는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았다.

숟가락 한 개, 쌀 한 톨 건지지 못한 우리 가족은 염부양반을 따라 금사리 마을에 마련된 피난민 수용소에 입소하게 되었다. 입소 절차를 마치고 배당받은 피난민수용동(棟)에 도착하자 먼저 와 있던 아는 사람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모두 그간의 고통을 얘기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피난민은 계속 모여들었다.

경찰이 태도를 바꾸어 피난민을 구조 선무하여 수용소에 수용한 속내는, 본격적인 공비토벌작전에 앞서 거추장스러운 민간인 피난민을 공비와 격리시킴으로써 작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경찰도 이제는 이성을 찾기 시작한 것 같았다.

공비가 민간인을 데리고 후퇴를 감행한 것 역시 그들대로 작전의 일환이었다. 정보제공의 우려도 있었지만 사실은 경찰이 선량한 민간인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으로 그들을 방패막이 삼아 저항하면서 시간을 버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저의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공비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상황이 호전되고 언젠가는 이곳도 탈환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시간벌기를 최우선 명제로 삼고 있었다. 그러한 실낱 같은 희망이 있었기에 공비들은 결사항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희망이 없었더라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귀순하는 공비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유치를 떠나다


금사리 피난민 수용소에는 날마다 새식구가 불어났다. 멀리 소양리를 지나 화순군과 경계지점인 취실 마을까지 피난갔다가 붙잡혀온 사람도 있고, 암천리에서 소양리 쪽으로 가지 않고 왼쪽 영암 쪽으로 가다가 국사봉 아래에서 붙잡혀온 사람, 발산 마을을 지나 중장터 쪽으로 가다가 나주 방면에서 붙잡혀온 사람 등 별의별 유형의 민간인이 속속 모여들었다. 여기저기서 모여든 피난민이 많다 보니 갖가지 정보나 소문도 난무했다.

출처가 어딘지 모르는 동숙 형에 대한 소문도 나돌았다. 산태몰에서 헤어진 이후 소식을 모르는 동숙 형의 얘기인 것이다. 운월리 부근 어느 동굴 속에 숨어 있던 동숙 형은 경찰에 귀순하여 유치지서에까지 왔다는 것이다. 지서에 온 형은 누군가로부터 소양리 마을에서 돌림병을 치료중이던 동운 형이 경찰 합동토벌대의 집중 공격을 받고 가마터재 너머 각수바위 부근에서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잖아도 장형 가족의 참변에 애통해하던 동숙 형은 동생의 사망 소식을 듣고는 하늘을 우러러 한동안 탄식하다가, 『큰형님네 가족과 아우가 다 죽었는데 나 혼자 살아서 무엇하리요!』 하고는 경찰의 감시를 피해 다시 산속으로 도망쳐버렸다는 것이다.

그 말의 진위 여부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이복동생이었지만 동숙 형이 동운 형을 사랑하는 마음은 유별났다. 여순반란 사건 직후 동운 형 때문에 경찰들에게 죽을 만큼 고문을 당하고도 조금치도 내색않은 동숙 형이었다. 민망해하는 어머니를 도리어 위로해주곤 하는 도량이 넓은 형이었다. 바리산에서 미아가 된 나를 찾기 위해 온 산을 헤매고 또 동운 형을 만나기 위해 소양리까지 찾아간 일은 동숙 형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형제애 때문이었다.

동운 형의 국방경비대 입대 소식을 서울에서 들은 동숙 형은 매우 기뻐하며 우리 집안에 장성이 나올 것이라고 큰소리치곤 했다. 자랑스럽게만 느꼈던 동생을 잃은 슬픔이 동복형제인 장형을 잃은 슬픔보다 더 했던 모양이다. 동숙 형은 결국 울분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입산했다는 것이다.

우리 집안 내력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때 재입산한 동숙 형이 무사히 북으로 넘어가 북한에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만나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들 하지만, 남해여단 같은 정규부대도 북상을 포기하고 남한 산골을 전전하다가 궤멸당했는데 형이 무슨 재주로 그 험한 삼팔선을 넘을 수 있었겠는가. 필시, 보림사 골짜기 이름 모를 어느 산속에서 경찰토벌대의 공격을 받아 무주고혼이 되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겠다. 이렇듯 한 집안에서 유골을 수습하지 못한 시신이 여섯 구나 된다는 사실은 진기록에 가까울 정도로 참담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고향 풍치가 문학도 만들어


생환소식을 듣고 인사차 다녀간 외숙 내외는 우리가 수용소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다시 찾아와 우리 가족을 외가로 데리고 갔다. 불탄 집터 주변에서 건진 볼품없는 가재도구와 넝마 같은 살림도구를 실은 달구지 뒤를 따라 나는 열두 해 동안 정들었던 고향땅 유치를 떠나게 되었다.

유치면의 마지막 땅 빈재 몰랭이에 당도하여 잠깐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고향을 떠나는 우리 가족의 슬픔을 하느님도 아시는지 갑자기 부슬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우리 가족은 장흥읍 사안리(沙岸里)에 위치한 외가 아래채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했다. 알거지가 되어 나타난 우리 가족을 뒷바라지하는 외숙 내외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장흥남초등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공교롭게도 내가 편입한 4학년 담임선생은 가족과 함께 몰살당한 내 친구 문봉섭의 형 문순섭씨였다. 용호대(토벌대) 생활을 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던 문선생님의 교사 변신은 뜻밖이었다. 문선생님은 내 처지를 가엾게 여겨 학비며 교과서 등을 무료로 제공해주시곤 했다.

1951년 늦은 봄 무렵에야 보림사 골짜기의 공비소탕 작전은 마무리되었다.

목숨을 부지한 잔당은 화악산을 넘고 청풍, 이양, 남면을 거쳐 모후산과 백아산으로, 혹은 더 멀리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1953년까지 오랫동안 저항을 계속했다.

난이 평정되고 농사철이 되자 어머니는 혼자서 공수평 마을로 들어가 불탄 집터에 움막을 짓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수확한 곡식을 트럭에 싣고 장흥집으로 내려와 온 가족이 함께 겨울을 보내곤 했다. 외숙집에서 더부살이하는 것도 눈치가 보여서 우리 가족은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 한 채를 헐값에 구해 분가를 했다.

어머니는 차비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도보로 그 먼 길을 왕래했다. 방학 때나 일요일에 이따끔 어머니를 따라 고향을 찾은 나는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는 여독으로 여러 날 고생하곤 했다.

모질게 살아가는 누나가 안쓰러웠던지 외숙은 유치의 전답을 팔아 장흥에 대토를 장만하게 했다. 난리에 혼이 난 주민이 모두 고향을 등져버리고 땅을 사고자 하는 외지사람도 별로 없는 터여서 유치의 전답을 거져 주다시피 헐값에 처분하고 읍내에 장만한 대토는 5분의 1 정도도 되지 않는 미미한 것이었다.

장흥읍 사안리 1구, 지금 장흥공설운동장이 위치한 바로 윗마을. 이곳이 나의 제2의 고향이다. 내가 군복무를 마치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 광주로 떠날 때까지 이곳 사안리에서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지만 이곳에 대한 애착은 별로 없다. 집안이 쑥밭이 되고 생사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긴 유년기의 고향 유치에 더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

돌아보고 싶지 않은 고향, 저주의 땅 유치에 웬 미련이 그렇게 많은지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몇 년 후 댐이 완공되고 나면 영영 물 속에 가라앉아버릴 고향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게 꼭 정답은 아닌 것 같다. 아마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 꿈을 키웠던 유년기의 여러 추억이 나의 뇌리를 선점해버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나의 안내로 보림사 구경을 갔다가 내 고향 공수평 주변의 아름다운 풍치에 매료된 직장 동료들이 감탄을 금치 못하며, 『좋은 곳에서 태어나셨군요. 그래서 신 형이 문학도가 됐나 봅니다』 하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이제, 내게 부여된 과업은 내 고향 유치의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 앞장서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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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장흥댐으로 바뀌었다던가? 어쨌든 차오르는 물과 함께 사라져갈 유치의 흔적을 찾아 다니다 발견한 1998년 12월에 실린 위의 논픽션 공모 당선작을 발견하게 되어 옮겨 두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역사적 사실들이 나름대로 기록된 유익한자료라는 생각이듭니다.

과거의 사실을 기록하신 신동규선생님의 수고에 갈채를 보냅니다. 그리고 유치의 역사인식에 유익한 사료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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