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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야생화
무등산에서 찍은 야생화인데 꽃이름을 잘 몰라요.
아시는 분은 코멘트 해 주세요.
이름이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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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무등산
무등산 민들레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흩어져 날릴 듯 한
짙푸른 풀잎 사이의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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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산(해남)
2005년 2월26일달마산은 아름다웠다.
겨울인데도 신기할 만큼 푸르름으로 가득했다. 동백과 아름다운 남해바다,병풍처럼 길게 뻗은 기암괴석의 달마산.
미황사 입구의 등산로를 따라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달마산의 정상 달마봉의 봉화대가 찾는 이를 맞이 한다.
달마산 달마봉 봉화대
달마산은 달마봉에서 도솔봉까지 줄곧 바위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달마봉에서 미황사을 등지고 왼쪽으로 가면 관음봉, 오른쪽으로 가면 도솔봉이 있다. 도솔봉에는 도솔암이 있기도 하다
달마산은 달마봉에서 도솔봉까지 약 7km정도 기암괴석으로 그 아름다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달마산은 고흥의 팔영산처럼 그 능선이 바위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색다른경치 를만끽하거나 등산로를 오르기 위해서는 설치된 줄을 자주 이용해야 한다.
문바위재의 문.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문처럼 절묘하게 뚫여 있다.
혹시 석간묘는 아닌지???
대밭 삼거리에 있는 터널로 석간묘는 아닌지(?)
답변이 될만한 자료를 찾아봤지만 보이질 않는다.
미황사 뒤로 달마산의 바위능선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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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황사
미황사(해남)
「신라 경덕왕 8년(749) 홀연히 한 석선(石船)이 달마산 아래 사자포구(獅子浦口)에 와서 닿았다고 한다 배안에서 천악범패(天樂梵唄)의 소리가 들리자 어부가 살피고자 했으나 배가 번번히 멀어져 갔다.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이를 듣고 장운(張雲)·장선(張善) 두 사미(沙彌), 촌주(村主) 우감(于甘), 향도(香徒)100인과 함께 목욕제계하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비로소 석선이 해안에 닿았는데, 그 곳에는 주조한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서 있었다. 그리고 배 안을 살피니 「화엄경」80권, 「법화경」 7권, 비로자나·문수보살 및 40성중(聖衆), 16나한과 탱화 등이 있고 금환(金環)과 흑석(黑石)이 각 한 개씩 있었다.
향도들이 경전과 부처님 상을 해안에 내려놓고 봉안할 장소를 의논할 때 흑석이 저절로 벌어지며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문득 커졌다.
이날 밤 의조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金人)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優塡國, 인도)왕으로서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경상(經像)을 모실 곳을 구하고 있는데, 이곳에 이르러 산 정상을 바라보니 1만불(一萬佛)이 나타나므로 여기에 온 것이다. 마땅히 소에 경을 싣고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경(經)을 봉안하라."고 일렀다.
이에 의조화상이 소에 경을 싣고 가는데 소가 가다 처음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산 골짜기에 이르러 다시 누우며 사찰을 창건하니 곧 통교사(通敎寺)요, 뒤에 누워 죽은 골짜기에는 미황사를 짓고 경과 상을 봉안했다. 미황사의 '미'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취한 것이고, '황'은 금인(金人)의 황홀한 색을 취한 것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지원년간(至元年間)(1264~1294)에 남송의 달관(達官), 군자들이 미황사에 내왕하기도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영암군(靈巖郡) 산천조(山川條) 달마산(達摩山)에 보면 「고려 때 승려 무외(無畏)의 記에 …(전략)… 그 암자(도솔암) 북쪽에는 서굴(西窟)이 있는데, 신라 때 의조화상이 비로소 붙어 살면서 낙일관(落日觀)을 수리하던 곳이요, 서쪽 골자기에는 미황사(美黃寺)·통교사(通敎寺)가 있다. 지원 신사년 겨울에 남송의 큰 배가 표류해 와, 이 산 동쪽에 정박했을 때 한 고관이 산을 가리키면서 주민에게 묻기를, "내가 듣기에 이 나라에 달마산이 있다 하는데 이 산이 그 산 아닌가."하므로 주민들이 "그렇다"하였다. 그 고관은 그 산을 향하여 예를 향하고, "우리나라는 다만 이름만 듣고 멀리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 생장했으니 부럽고 부럽도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가 상주할 땅이다."하고 그림으로 그려갔으니 위대하다. 이 산이여, 어찌 매우 높고 빼어난 모양이 산과 바다의 아름답고 풍부함을 다 했을 뿐이랴. 그 성적과 영험한 자취도 많도다. 또 외국인들까지도 우러르고 공경함이 저와 같다.」고 한다.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고려 후기 절이 국내외적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었고,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나름대로 사세를 꾸준히 유지해 온 것으로 보인다.『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권35 영암(靈巖) 불우조(佛宇條)에 통교사, 미황사가 기재되어 있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정유재란 때(1597)건물이 불타버렸고기록마저 없다.
그러나 중기 이후 미황사의 역사는 1754년(영조 30)<미황사법당중수상량문>에 나타나 있다. 이 상량문은 1982년 대웅전 복원 공사 때 발견된 것으로 미황사가 임진왜란 이후 3차례의 중건이 있었음 기록하고 있다. 첫 번째 중건은 1597년(선조 30)정유재란 때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어 만선스님의 담당하에 다음 해부터 공사를 시작해서 1601년에 마무리되었으며,두 번째는효종 9년인 1658년에서 시작하여 1660년까지 성간(省侃)·수신(脩信) 스님의 담당으로 이루어졌고 세 번째는 영조 27년인 1751년)에 덕수(德修) 스님에 의해 시작되어 상량문이 씌어진 1754년에 마무리되었다고 한다.불사를 하기위해 1751년에 동서 양쪽에 금고각(金鼓閣)을 세우고 이듬해 기와를 바꾸었으며, 1753년에는 보길도(甫吉島)에서 목재를 실어 왔고,이듬해 대웅전과 나한전을 완공했다 한다.
그러나 100년 전 주지 혼허(渾墟) 스님이 중창을 위해 모금차 군고단(軍鼓團)을 이끌고 완도와 청산도를 가다 배가 조난을 당한 뒤에 점차 퇴락하여 급기야는 빈 절이 되고 말았는데 지운스님과 현공스님, 금강스님이 1989년에 주인 없이 비어있던 미황사에 와 흔적만 남은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 달마전, 부도암 등을 복원하고, 퇴락한 세심당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10여년 간 중창불사 원력을 세워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로 면모가 일신되었습니다.
http://www.mihwangsa.com/미황사 홈페이지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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